이 여행기의 실제 여행일은 2005년 5월 20일입니다.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을 옮기는 과정에서 작성일 간에 차이가 다소 납니다만, 여행 당시의 기록을 최대한 살리면서, 현재와 차이나는 점은 다소 수정하였습니다.

세르비아어로 페치(Пећ, Peć) 알바니아어로 페야(Peja) 또는 페여(Pejë)라고 불리는 이 도시는 한때 세르비아 정교회의 중심지였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 문화권이 된 곳이다.

페치가 맞나, 페야가 맞나

사실 코소보는 주로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된 국가라, 쓰이는 언어도 알바니아어가 많다. 하지만 소수민족으로 세르비아계가 있어 세르비아어도 종종 쓰인다. 문제는 지명인데, 한때 코소보가 세르비아의 영토(지금도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신의 영토라 주장중)였기 때문에 지명의 상당수가 세르비아식이고, 국제적으로도 세르비아식이 고착된 경우가 많다.

이 동네 '페치'도 원래 다수의 코소보인들이 부르는 '페야'나 '페여'라고 해야겠지만, 국제적으론 '페치'가 훨씬 잘 알려져있고 고착화되었기에 여기서도 '페치'라 하겠다.

페치에 도착했는데, 길거리에 수백명의 동네주민들이 봇물 터지듯 나와있었다. 첨엔 무슨 민중봉기라도 난 줄 알고 내심 겁나있었는데, 알고보니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유명 연예인으로 보이는 몇몇 아가씨들이 관광버스 타고 도착해서 손 몇번 흔들어주고 가더라.

하지만 그 행사에 모인 인파 덕에는 모든 차량이 도심 진입 불가. 결국 길 위에서 대충 40~50분 정도 기다렸을까, 행사가 좀 정리되었는지 주민들이 조금씩 흩어졌다.

데차니(Dečani) 수도원

14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아 정교회 수도원으로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

입구.

코소보의 모든 수도원은 유엔군 혹은 나토군의 보호 하에 있다. 종교가 이슬람인 코소보 주민들이 데차니와 같은 기독교계 수도원을 테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들어갈 때도, 초소에 있던 이탈리아 군인들의 검문을 30분간이나 받고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막상 들어가서는 알아서 살펴보라고 하고는 멀리서 총들고 보고있음.

수도원내 예배당.

이 예배당 문의 장식이 무척 화려하다.

예수와 세례요한.

사실 이 예배당 안을 구경할 수 있었다. 수도사들이 나름 친절히 안쪽으로 안내해주었는데, 때마침 예배중이었다. 그래서 사진은 찍지 않았다.

검은 복장의 수도승들이 주문을 외우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는 소리, 그리고 오직 촛불만 있는 조명. 마치 중세시대로 시간을 되돌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도승들이 실제 거주중인 것으로 보이는 건물.

코소보 전쟁

앞서 코소보의 거의 모든 기독계 시설은 유엔군 혹은 나토군의 보호를 받는 중이라 언급했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 씨발 역시 이슬람 신도들 개색퀴들...' 요러실 수도 있겠지만, 코소보 전쟁을 들여다보면 이 분노의 원인이 나온다.

때는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20세기 초. 난데없이 공짜로 땅을 얻은 세르비아는 당시 이 지역을 자신의 영토에 포함시키고자 세르비아에 살던 주민들을 코소보 지역을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 코소보 땅에 살던 민족은 알바니아민족. 하지만 초창기엔 별다른 문제없이 잘 어울려 살았더랬다. 예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이 서로 잘 어울려 살았던 것처럼.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발칸반도의 콘트롤 스틱을 잡으면서, 유고의 일인자 '티토'는 고의적으로 코소보 지역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레 거지동네가 되도록 냅두는데... 그렇게 한 주된 이유는 알바니아가 유고연방 가입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티토를 씹었기 때문이다. 즉, '코소보엔 알바니아인들이 많이 사니까, 걔들 지원 끊어야징~'한 거.

불만이 쌓인 코소보에서는 80년대 초부터 여러차례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유고는 무력으로 진압하여 수백명이 죽고, 투옥되는 일이 밥먹듯이 일어난다. 마침내 유고연방이 해체되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등의 나라가 독립할 때에도 구 유고연방의 중심축이었던 세르비아는 유독 코소보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있던 자치권마저 박탈하고, 코소보의 알바니아어(코소보는 알바니아어를 쓴다) 언론사들을 없애버리는 한편, 무려 11만명에 달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줘버린다. 결국 코소보인들의 불만이 대폭발.

결국 아일랜드의 IRA와 같은 '코소보 해방군(KLA, Kosovo Liberation Army)'라고 하는 게릴라군을 자체적으로 조직하여, 세르비아를 상대로 게릴라전술을 펼치게된다. 이에 대한 세르비아의 화답은 ...?

인종청소작전. 이 작전은 20세기 끝자락에 행해진 나치식 인종말살책이었는데, 방법은 간단하다. 코소보는 세르비아땅이므로, 문제가 되고 있는 코소보인을 싸그리 죽이면 된다. 끝.

이에 세르비아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데로 코소보인을 죽이기 시작하여, 이때 생긴 난민만해도 현재 집계로 1백만명이다. 

결국 이 사건에 유엔과 나토가 개입하게 되고, 세르비아의 비인간적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게 되지만, 역시나 세르비아는 거부. 결국 나토는 베오그라드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게 되고,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 밀로셰비치가 잡히면서 일단락된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전쟁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된다. 그리고 코소보는 신생독립국의 모습으로 국제무대에 얼굴을 들이밀 때까지 유엔의 임시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남은 것은 이웃 민족간의 깊은 상처뿐. 코소보라는 땅덩어리에서 수천년간 잘살고 있던 세르비아계(기독교) 주민과 알바이나계(이슬람) 주민들은, 현재 서로서로 의심하는 상태로 살고있다. 하지만 수적 우세가 알바니아계에 있는 관계로 소수인 세르비아계가 종종 테러를 당하는 상황. 따라서 위와같은 수도원은 더 안정될 때까지 군인들의 보호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하게 하는 코소보 첫번째 여행지.

반응형

+ 최근글